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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에게 성적 자기결정권을!

법원, 남편에 강제추행 유죄선고 의의


조이여울 기자


2년 전 울산에서는 한 남성으로부터 지속적인 구타와 강간을 당해 온 여성이 더 이상은 견딜 수 없어 그 남성이 자는 동안 목을 졸라 숨지게 한 사건이 발생했다. “늘 강간을 당했다. 강간을 피할 수 없었다”고 진술한 그 여성이, 10여 년간이나 세상에 구조요청을 할 수 없었던 이유는 한 가지다. 그것은 가해자가 그 여성의 남편이었기 때문이다.

성폭력은 ‘정조권’ 아닌 ‘성적 자기결정권’ 침해

지난 20일 아내를 성추행 한 남편에게 우리 법원이 처음으로 유죄(강제추행 치상)를 선고했다. 재판부(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2부 부장판사 최완주)는 부부 간에도 ‘성적 자기결정권’이 있으며, 이를 침해하는 행위는 법이 용인하지 않는다는 것을 밝혔다. 이는 부부간 강제추행만이 아니라 강간죄가 성립한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이번 판결이 2004년 한국에서 화제가 되고 있다는 것은 바꿔 말해 지금까지 우리 역사 속에서 ‘아내’라는 이름의 여성들은 성폭력을 당해도 법이 구제해주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이들이 겪은 피해가 성폭력이라는 사실조차 인정해주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아내의 몸을 남편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소유물’로 보고 있었다는 얘기다.

이러한 인식은 성폭력 범죄를 ‘부녀에 대한 정조 침해의 죄’로 바라보는 사회적 통념과 맥을 같이 한다. 성폭력을 ‘한 남자(남편 혹은 남편이 될 자)의 소유’인 여성의 몸을 다른 남성이 침범한 행위라고 보았을 때, 부부 간에 강간죄는 성립되지 않게 된다. ‘정조’라는 개념 자체가 배우자 이외의 사람과 성적인 접촉을 하지 않는 것을 뜻하므로, 아내와 남편 상호간에는 침해할 “정조권”이 없기 때문이다. 이 같은 시각은 결국 결혼한 여성에겐 지켜야 할 ‘정조’는 있으나 ‘성적 자기결정권’은 없는 것으로 본다.

“강간인데 강간 아니다”?

여성운동진영에서는 수년 전부터 남편으로부터 폭력과 더불어 성적 학대를 겪는 아내들의 숱한 사례들을 토대로 아내 강간을 인정하라고 요구해왔다. 배우자로부터 가해지는 성폭력은 피해자에게 더 큰 굴욕감과 무력감을 주며, 일상적인 공포에 시달리도록 만든다. 그럼에도 ‘가족’이라는 테두리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피해자는 가해자와의 관계망을 벗어나기 어렵고, 지지기반도 없어 그 피해와 후유증도 커질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부부 간 성폭력을 인정하라”는 주장은 사회적으로 다분히 ‘급진적’인 것으로 읽혀져 왔고 법조계 인사들을 비롯한 많은 남성들이 회의적인 반응을 보여왔다. 아내강간을 인정하지 않는 이들의 주장은 다음의 두 가지로 요약된다. “부부 사이에 성폭력이 있을 수 없다”는 것과 “성폭력을 행사했다 하더라도 처벌해선 안 된다”는 것.

“부부 사이에 어떻게 성폭력이 있을 수 있는가”라고 반문하는 이들은 앞서 이야기한 대로 성폭력을 정조권 침해범죄로 보고 있으며, 여성에게 ‘성적 자기결정권’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성폭력과 성관계를 구분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가 있는 인물들이라 할 수 있다.

한편 “남편이 아내를 강간했다 해도 처벌해선 안 된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성폭력 가해자의 편에 서서 ‘강간인데 강간이 아니다’라는 모순된 주장을 해왔다. 그런데 이 같은 주장이 바로 우리 대법원이 1970년에 내린 판결의 내용이다. “실질적인 부부관계가 유지되고 있는 경우에는 설령 남편이 폭력으로써 강제로 아내를 간음했다 하더라도 강간죄는 성립하지 않는다”고 했다. 보수적인 한국 법조계의 ‘관행’상 이 판례는 30년간이나 족쇄가 되어 우리 사회에서 부부 간 성폭력을 은폐시키는 역할을 해왔다.

법원, 왜곡된 통념 깨는데 제 역할 하길

남편의 아내에 대한 강제추행 행위에 대해 ‘유죄’를 선고한 이번 판결이 특히 반가운 이유는 재판부가 ‘성적 자기결정권’의 개념을 명확히 했다는 점이다. 검찰은 30년도 더 묵은 대법원 판례를 들먹이며, 남편에 의한 강간사건을 아예 기소조차 하지 않아왔다. 이번 판결도 참으로 늦었다는 판단이 들지만, 기존의 판례를 교과서로 삼는 우리 법조계의 뒤떨어진 현실감각과 인권의식 등을 감안했을 때 박수를 보내야 할 일이다.

이번 판결이 그간 성폭력에 대해 떨치지 못하고 있던 사회적 통념들을 떨궈내고 ‘성적 자기결정권’이라는 개념이 우리 사회에 뿌리내리도록 하는 데 큰 역할을 하리라 본다. 그리고 ‘성적 자기결정권’을 인정하지 않았던 수많은 판례들- ‘목숨을 건 반항’을 한 증거가 있어야만 강간을 인정한다든가, “보호해야 할 인권은 따로 있다”는 식의-을 이제 더는 접할 수 없게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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