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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같은 고통속 15년을 떨었는데 그 아이를 꼭 철창에 가둬야 하는가
상습적인 가정폭력을 휘둘러온 알콜중독자 아버지를 넥타이로 목 졸라 살해한 여중생 이양(15)의 선처를 호소하는 여론이 일고 있다. 이와관련 정신과 의사 겸 칼럼리스트인 정혜신씨가 <오마이뉴스>에 글을 보내왔다. 다음은 기고문 전문이다... 편집자주





가끔 상담실에서 가정폭력의 몸서리치는 사례를 접한다. 그 끔찍함의 정도는 상상을 초월한다. 짐승같은 인간들이 휘두른 폭력의 잔인함과 피해자들이 겪은 상시적(常時的)인 공포의 실체를 자세히 알게 된다면 누구라도 아버지를 살해한 자식의 심정이나 남편을 죽인 아내의 심정을 ‘이해하고도 남는다’고 할 것이다.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폭력을 일삼는 아버지를 살해한 강릉 여중생 사건을 보며 나는 가슴이 터질 듯한 분노와 동시에 통증을 느낀다. 백일이 지나고 엄마가 집을 나간 이후 계속해서 짐승같은 가정폭력에 시달리며 살아온 15살 소녀의 끝간데없는 공포와 절망감을 말로 설명하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런 아이를 존속살해 혐의로 긴급체포해 구속상태에서 수사를 진행하는 실정법의 근본정신을 나는 이해할 수 없다. 구속상태가 아니면 조사를 진행할 수 없는가. 살인혐의를 받고 있는 피의자를 풀어줄 수 없다는 법의 관행 때문인가. 감정적으로 말하면 관할 경찰서와 검찰청 유리창에 돌이라도 던지고 싶을만큼 기계적으로 법을 적용하고 있는 실정법의 집행자들에게 분노를 느낀다.


아버지를 죽이겠다는 적극적 의지는 없었더라도 '아버지가 죽었으면 좋겠다, 이렇게 하면 죽을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했다는 이유로 소위 미필적 고의 따위의 사법적 판단을 적용해서 아이를 '가두어 놓고' 조사를 벌이는 경찰과 검찰의 모습은 희극에 가깝다. 법률적 차원에서가 아니라 정신의학적 차원에서 그렇다.


이양에게 살인죄를 물어선 안된다


정신과 의사의 처지에서 결론부터 말하자. 이양에게 살인죄를 물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마치 생체실험을 당하다가 극악무도한 실험자를 죽이고 구사일생으로 도망쳐 나온 이에게 '상황은 이해하지만 살인에 대한 죄과는 치러야 한다'고 말하는 일처럼 무지하다. 생체실험의 비유가 지나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지속적인 가정폭력에 노출된 이들, 특히나 저항할 힘도 또 거기에서 탈출할 수 있는 방법조차도 알 수 없는 아이들에게 행해지는 폭력은 꼼짝없이 묶인 채로 생체실험을 당하는 것과 같은 지옥의 고통이다.


살인적인 고문을 당하는 사람 조차도 1년 내내 고문자와 한 방에서 지내지는 않는다. 극단의 가정폭력은 잔인한 고문기술자와 한 방에서 평생을 살아가는 일이다.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감정적 과장이라고 손사래를 칠 수도 있지만 피해자를 한번이라도 만나 그들의 얘기에 기울여 본 사람은 감히 그렇게 말하지 못한다. 권력의 고문은 실체가 분명하지만 가정폭력을 휘두르는 짐승들은 '드러나지 않는 고문자'다. 그래서 피해 당사자에겐 더 공포스럽다.


폭력적인 아버지가 퇴근해서 집에 올 시간이 가까워지면 자동적으로 공포와 두려움으로 심장이 터져버릴만큼 두근거리는 아이에게 가정이란 고문실의 또다른 이름이다. 소설가 유재현은 그의 소설에서 다혈질 고문자를 만난 피고문자의 공포를 이렇게 묘사한다.


“그를 괴롭혔던 것은 고문할 때 드러나는 사내의 광기가 실수로 그의 의지를 뛰어넘어 그를 죽이게 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었다. 박달나무 몽둥이가 허공을 가르며 그의 머리에 부딪힐 때나 그 사내가 분에 못이겨 책상을 뛰어넘어 목을 조를 때, 얼굴에 덮고 물을 부은 수건의 그 천근보다 무거운 무게에 눌린 심장이 터질 듯이 발악을 할 때마다 그는 매번 그런 공포에 시달려야 했다. 실수로, 실수로 살아 나가지 못할까봐.”


여중생 이양도 아버지가 술에 취해 제 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폭력을 행사할 때마다 아버지의 실수로 내가 죽을 수도 있다는 공포에 시달렸을 것이다.


길가다 느닷없는 폭행을 당하면 가해자에게 그에 상응하여 정당한 분노를 표출할 수 있지만 가정폭력의 경우는 문제가 좀 다르다. 얼마전 극악무도한 부모가 아이가 말을 듣지 않고 말썽을 피운다는 이유로 몇 년동안 계속해서 걸핏하면 밥을 굶겨서 가두고, 담뱃불로 지지고 바늘로 온 몸을 찌르며 학대하다가 마침내 아이가 죽는 바람에 그 일이 세상에 드러난 적이 있었다.


그 일이 명명백백하게 드러나기 전까지 그 어린 아이는 자신이 겪은 학대와 고통을 다른 사람에게 ‘엄마에게 맞았다’라는 정도로밖에는 달리 말할 수 없었을 것이고 또 듣는 사람들은 ‘엄마가 괜히 그러셨겠니?’ 하는 정도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양에 대한 사람들의 의견 중에도 ‘아빠의 삶이 얼마나 고단했으면 그랬겠니?‘ 하는 어처구니없는 반응들이 눈에 띈다.


멀리서 바라보는 사람의 눈에는 비행 구름을 만들며 날아가는 초고속 제트기의 속도가 집앞 도로에서 달리는 자동차의 속도나 별반 차이가 없게 느껴진다. 타인의 경험을 멀리서 여유롭게 관전하는 사람에게는 가끔 부모에게 꾸중을 들으며 살아가는 보통의 아이들과 이양의 고통의 차이도 거기서 거기다.


아버지가 술마시고 심하게 행패를 부린 날 저녁에 '오늘은... 음.... 힘든 날이었다'고 일기장에 적으면서도 바로 다음 줄에는 '무엇 때문에 견디기 힘든지 그걸 모르겠다'며 '난 너무 바보같다' '내가 죽어야 할아버지 할머니가 편히 나은 생을 사실텐데'라고 생각하는 이양은 만성적인 폭력과 학대로 인해 현실검증력이 붕괴되는 과정을 날 것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고문자의 잔인함은 피해자에게 오히려 죄의식을 갖게 한다는 점에서 전방위 폭력의 완성판이다.



법은 법이므로 지켜져야 한다고?


그럼에도 일부 네티즌들은 법은 법이므로 지켜져야 한다거나 죽은 아버지도 패륜의 대가를 받았으므로 아이도 처벌이 불가피하다고 말한다. 패륜을 조장할 수 없다는 단호한 어조도 눈에 뜨인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이 사건의 본질은 ‘아무리 미워도 자식이 부모를 죽이는 것이 말이 되느냐’와 같은 부모, 자식간 관계의 문제가 아니다. 한 인간이 감내할 수 있는 고통의 정도가 어디까지인지 혹은 인간이 자신을 조절하고 통제할 수 있는 자유의지의 작동이 어느 선까지 가능한지에 대한 의학적, 철학적 명제에 대한 고민에 더 집중해야 마땅하다.


늘상 세간을 때려부수고 같이 사는 자기 부모(아이의 조부모)와 딸을 상시로 구타하고 4살난 딸을 세탁기에 넣고 돌렸던 아빠와 살아온 아이, 술먹고 학원에 와서 친구들 앞에서 딸을 발로 차고 얼굴을 때리는 아빠와 살며 ‘너무 창피하다. 내가 너무 불쌍하다’고 되뇌이던 아이. 아빠가 어쩌다 배를 타고 일하러 나가는 날이면 ‘아빠가 없으니까 너무 좋다. 너무 마음이 놓이고. 언제나 이랬으면 좋겠다’고 넋두리하던 아이.


이렇게 15년을 버텨온 아이에게 ‘네가 더 참았어야 할 것 중에 너의 모자람으로 인해 참지 못한 부분은 벌로써 책임을 져야한다’고 요구하는 것은 정상적인 사회가 아니다. 과연 아버지를 죽인 그 아이의 순간적 충동은 그가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의 것이었을까.


정신의학에서는 외적 스트레스와 연관되어 발생하는 불안장애를 적응장애와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으로 나눈다. 스트레스 강도에 따른 분류인데 생활상의 스트레스로 인해 촉발된 불안장애라면 '적응장애'에 속하고 인간이 감당하기 거의 불가능한 극단의 스트레스로 인해 촉발된 불안장애는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에 속한다.


예를 들어 전학을 한 아이가 그로 인한 스트레스 때문에 불안증세 등을 겪는다면 이것은 적응장애이지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은 아니다. 전학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심리적 긴장을 요구하기 때문에 객관적인 스트레스 상황이긴 하지만 전학하는 대부분의 학생에게 불안증세를 유발할 만큼 압도적인 스트레스라고 보긴 어렵기 때문이다. 그 상황을 심리적으로 소화해내는 개인차가 존재한다.


그에 반해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은 개인차가 별 의미가 없다. 이때의 스트레스는 정신의학에서 ‘catastropic level'이라고 따로 분류한다. 파국적(catastrophic) 상황이란 ’같은 스트레스에도 개인에 따른 저항력에 차이가 있다‘는 인간의 개별화에 대한 보편적 상식마저 여지없이 뭉개버릴만큼 압도적이다. 파국적 수준의 스트레스란 그런 상황에 놓이면 아무리 강인한 체력과 정신력을 지닌 사람이라도 예외없이 망가질 수밖에 없다는 ’재앙적 상황‘을 일컫는 개념이다.


강간을 당한 여자는 아무리 평소에 낙천적인 기질의 소유자였다고 해도 돌이키기 힘든 정신적 내상을 입는다. 여자는 강간 이전의 삶으로 온전히 돌아가기 힘들 수도 있다. 대구 지하철 참사의 현장에서 살아난 생존자들이 당시 옆에 탔던 아이가 말하던 “엄마, 숨 막혀”같은 소리를 지금까지도 환청으로 듣는 현상은 그가 원래 성격적으로 예민했던 사람이라서가 아니다. 파국적, 재앙적 경험속에서 인간의 자유의지가 정상적으로 작동되길 기대하는 것은 당사자에겐 2차적 폭력이 된다.


대구 지하철 참사로 목숨을 잃은 사람이나 그로인한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을 겪고있는 생존자에게 “바로 그 시각에 전철을 탄 것은 결국 너 자신이 아니었느냐”면서 그들에게 최소한의 개인적 책임을 요구한다면 그것은 얼마나 어처구니없고 끔찍한 폭력인가. ‘파국적 스트레스' 개념을 개인의 의지가 완전히 압도당하는 저항불능의 스트레스라고 규정하는 정신의학적 인식을 법률의 영역으로 환치해본다면 이양에게 개인적 책임을 묻는 일은 부당하다.


대구지하철 참사의 생존자들을 대상으로 한 뇌단층촬영 연구에서도 증명된 것처럼 단 한번이라도 파국적 충격에 노출된 사람은 뇌기능에 심각한 변화가 올만큼 결정적 상처를 입는다. 만일 한번이 아니고 지속적으로 이러한 파국적 스트레스에 노출된다면? 15년 동안을 그런 스트레스 속에서 살아온 아이를 살인혐의로 철창안에 가두어 놓고 우리는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것인가.


하지만 그런 근본적인 이유를 따지기에 앞서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은 이양을 풀어주는 일이다. 시민단체들이 구명대책위원회를 결성하고 주위사람들이 선처를 호소하는 탄원서를 제출하는 등의 여론때문이 아니다. 15살 소녀에게 도주의 위험이 있거나 증거인멸의 우려가 있는 것도 아니잖은가.




정신세계 허물어지는 응급상황... 일단 풀어주는게 급선무


희대의 살인마라도 구속 중에 맹장염정도의 응급상황만 발생해도 먼저 수술를 한 후 생명을 살려놓고 조사를 진행하는 게 상식이다. 정신과 의사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으로 판단하기에 지금 이양은 정신적으로 맹장염보다 훨씬 더 심각한 위급상태에 빠져 있다. 아버지에 대한 증오와 죄의식, 자신의 행동에 대한 충격과 아버지 없는 세상에 대한 안도감 등으로 분열되어갈 아이의 심리는 지금 바로 치료되어야 할 위급한 질병 그 자체이다.


15살 소녀의 정신세계가 대책없이 허물어져 내리는 응급상황에서 무엇보다 우선해야 하는 것은 아이에게 죄가 있다고 볼 것이냐 아니냐 따위의 한가로운 논의가 아니라 그 아이의 치명적인 심리적 내상을 치료하는 일이다. 아무리 법률적 검토는 경찰과 법원의 몫이라지만 상식적으로 조금만 생각해 보면 금방 해결책이 나올 수 있는 일에 대해 여론의 추이를 살피고 법률적 갑론을박을 되풀이하는 것은 죄악이다.


아마도 이양은 지금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건강이 어느 정도인지 매우 불안해 하고 있을 것이다. 자신 때문에 할아버지, 할머니마저 돌아가시는 건 아닌가 하는 상상으로 절망을 넘어 심리적 마비(psychic numbness)가 왔을 가능성도 높다.



이양은 자신이 유일하게 기대어 왔던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지금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지에 대해 매우 초조해하고 있을 것이고 친구들과 선생님이 자기를 어떻게 여길까 생각하면서 날선 칼에 심장이 베이는 통증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이양은 ‘신은 견디지 못할 시련은 주지 않는다’는 자기암시로 삶을 지탱해왔지만 세상에는 신도 견디지 못할 일이 있다. 이양은 지금 바로 구속상태에서 풀려나야 한다. 그리고 그 아이에게 필요한 치료적 환경에서 충분한 보살핌과 치료를 받아야 한다. 모든 조사와 논의는 그 다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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